마지막 수정 날짜 : 2019/08/07

사람은 여러 가지 판단을 하는데, 그 판단은 크게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으로 나뉜다. 그리고 가치 판단도 여러 종류의 판단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도덕에 대한 가치 판단이다. X의 Y한 행위는 (윤리적으로/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라고 판단하는 것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 판단적 서술을 금하지 않는 위키에서는, 윤리 또는 도덕적 가치판단도 왕왕 일어나게 된다(위키와 가치 판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단은 이 글을 참고하자). 그리고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 중 하나는, ‘자신이 그르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 이를 공개적으로 고발함으로서, 피고발자의 도덕적 문제를 널리 지탄받는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원리이다.

그러나 ‘선의 = 올바른 행위’가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센의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혹자에 따르면 ‘좋음에 대한 의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는, 모든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선함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모든 인간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든 좋기 때문에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Y한 행위가 좋다고 해서 행동했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지, 보편적 도덕률에 알맞는지를 판단할 때는 더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특히나 ‘악행에 대한 고발’은, 그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사용될 의도가 다분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요소 중에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도 존재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을 공격하면 그것은 야만적 폭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공격성을 나쁜 놈에게 돌림으로서 자신의 저열한 공격성을 ‘정의구현’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자신이 ‘악인을 공격’ 하여 정의에 기여하였다는 도덕적 우월감의 과시 수단이 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적 태도가 격식있는 오프라인에서의 자리와 비교해 재앙적으로 부족한 인터넷 공간에서는 타인을 별 시덥잖은 이유로도 공격하는 것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렇게 공격성으로 가득한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방이 악행을 했다’는 사실(?)까지 겹쳐지면, 그 공격성의 발현은 들불처럼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위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가치 판단적 서술을 원천적으로 금하지 않는 위키에서는, 서술 대상에 대해서 그가 나쁜 놈이라느니, 비윤리적이라느니 하는 공격적 서술이 가능하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쁜 놈이라는 인식이 위키의 총의 또는 다수 의견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을 제지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거나, 설령 어떤 사람이 나서서 지나친 공격이 아니냐고 했을 때 “욕먹는 놈이 욕먹는건 당연하다” 내지는, “너는 ㅁㅁ의 추종자 아니냐?” 식의 공격으로 이견을 강제로 침묵시킨다. 이 상황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정책으로 아예 가치 판단을 원천 봉쇄하거나, 아니면 요행히 사람들의 총의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아예 비속어를 사용한 표현, 감정적 표현을 금지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속어, 감정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글의 공격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라도 얼마든지 상대에 대한 모독, 비난하는 것은 가득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도덕률과 법 이론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보증수표를 끊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디시위키나 나무위키 등에서 서술되는 ‘알량한 정의감의 충족을 위한 서술’ 대다수는 법적으로 범죄인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위키가 악행을 징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라는 주장마저도 객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오직 그 위키커뮤니티 내의 ‘총의’ 내지는 다수설을 제외하고 말이다) 결국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충족되지 않은 채 ‘저놈이 나쁜 짓을 했다’는 위키의 고발성 서술은, 서술자 본인에게는 ‘정의구현으로 포장한 공격성의 만족’으로, 그리고 그 문서를 보고 공감하는 이들에게는 ‘정의구현으로 포장한 관음증의 충족’밖에 되지 않는다.